[영화 리뷰] 스타쉽 트루퍼스(1997)
- SF 전쟁물의 탈을 쓴 섬뜩한 블랙코미디
주의) 영화에 대한 시각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주의) 스포일러가 다수 있습니다.
오래간만에 <스타쉽 트루퍼스>를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보니 역시 감회가 새롭습니다. 어렸을 적 OCN에서 틀어주는 걸 얼마나 많이 봤던지 오랫동안 못 만났던 정든 친구를 만나는 것 같습니다. 대강 영화에 대해 요약 하자면 지구의 젊은 남녀 병사들이 인류를 위협하는 곤충형 외계인에 맞서서 싸운다는 내용의 SF 전쟁영화입니다.
그렇습니다.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했던 젊은 친구들이라면 모두 한 번쯤 '이거 완전 테란이랑 저그잖아!'하고 좋아했던 영화일겁니다. 물론 <스타쉽 트루퍼스>가 스타크래프트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스타크래프트 제작진도 <스타쉽 트루퍼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얘기했으며 브루드워 캠페인 컷신에서는 <스타쉽 트루퍼스>에 대한 오마주 장면도 등장합니다. 워해머 40k의 스페이스 마린의 콘셉트가 <스타쉽 트루퍼스> 원작 소설의 강화복병사에게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꽤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만큼 <스타쉽 트루퍼스>가 원작 소설이든 영화판이든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에 등장하는 '강화복'이나 '곤충형 외계인과의 전쟁'같은 요소들에 간접적으로나마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작품인 것이겠죠. 영화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실패했으나 그런 것 치고는 훗날 여타 다른 작품들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나름 기념비적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단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근미래의 지구, 학교 졸업을 앞둔 평범한 청년 리코에게는 '군 입대라는 시민으로서의 의무'는 아무래도 좋은, 단지 귀찮은 것에 불과합니다. 머리 쓰는 일에는 익숙하진 않지만 여자 친구에게는 진심이었던 리코. 그러던 그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잘 아는 똑똑한' 여자 친구 때문에 덩달아 군입대를 하게 됩니다.
훈련소 생활을 거치며 생각보다 군인이 적성에 맞는다는 걸 깨달아가는 리코. 어느 날 자신의 실수로 동료가 훈련 중 사망하게 됩니다. 태형을 선고받고 호되게 채찍질당한 리코는 징계 이후 군인의 길을 포기하려던 차에 자신의 고향이 외계인의 손에 파괴된 것을 알게 됩니다.
외계인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 리코는 전쟁에 뛰어들어 수많은 작전을 수행하며 멋진 활약을 펼칩니다. 그 와중에 비록 정신적 멘토와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겪지만 영화 결말에 이르러선 진정한 군인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어렸을 때 생각 없이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근사한 전쟁 SF영화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지금 와서 다시 보니 섬뜩한 면이 적지 않은 블랙 코미디 영화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 영화는 평범한 젊은이가 군국주의 체제하의 군대에서 규율과 '군인정신'을 몸과 마음으로 새기면서 점점 국가가 원하는 '모범병사'가 되어가는, 일종의 <1984> 같은 작품입니다. 물론 톤은 훨씬 소프트하지만요.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계관 내의 파시즘적 성향을 결코 감추지 않습니다. 그것을 아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강의 장면에 나오는 대사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교사: 좋아, 한번 정리해보자. 올해 우리는 민주주의의 실패에 대해 배웠다.
어떻게 우리의 사회과학자들이 우리의 사회를 혼돈의 위기로 몰아넣었는지 말이지.
우리는 군인들이 어떻게 통제권을 잡고 몇 세대에 걸친 안정된 사회를 세웠는지도 배웠고 말이야
학생 1: 우리 엄마는 폭력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교사: 그런가? 히로시마에 있던 사람들은 과연 그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한데?
학생 2:아무 말도 못 하죠. 히로시마는 파괴되었으니까요
교사: 맞아. 순수한 힘은 그 어떤 다른 요소들보다 더 많은 갈등을 해결해왔어. 폭력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반대 의견은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지. 그 사실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대가를 치르게 되지
교사: 왜 오직 시민만이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허용되지?
학생:투표권은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연방에 의무를 다했기 때문에 연방이 주는 것이지요
교사:틀렸다. 그냥 주어지는 것은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투표를 할 때 너는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고 그건 힘을 사용하는 거다. 힘은 곧 폭력이고 폭력은 모든 권력의 근원이지
대충 이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지금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군부 쿠데타가 오래 지속되었는지 시민들도 이에 대해 아무 의문을 품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또 한 가지 충격적인 대목은 영화 중반부에 등장합니다.
젊은 남녀 병사들이 모두 함께(!?) 샤워를 하며 잡담을 나누다가 왜 군대에 입대했는지 서로에게 묻습니다. 일부는 그냥 평범한 답변이지만 눈여겨볼만한 답변이 있습니다.
나는 아기가 갖고 싶어서 입대했어. 군 복무를 해야 면허를 따기 더 쉬워지니까...
그렇습니다. 하나의 통일된 군국주의 세계 정부가 다스리는 이 세계에선 군인이 아니면 정치를 할 수도 없을뿐더러 심지어 출산할 권리마저 제한되는 완전한 디스토피아인 것입니다. 또한 군 복무기간은 별다른 제한 없이 국가의 필요에 의해 언제든지 연장될 수 있으며 그 누구에게도 이에 대한 결정권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설명만 들으면 굉장히 절망적인 사회인 것 같습니다만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놀랍게도 굉장히 밝고 가볍습니다. 저는 이 영화 전체에서 느껴지는 지극히 가벼운 느낌들이 폴 버호벤 감독이 원작의 파시즘을 풍자하고자 의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감독, 폴 버호벤은 나치 치하를 경험하면서 파시즘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는데 하인라인이 쓴 원작 소설은 대놓고 파시즘 성향이 물신 뿜어 나오는 내용입니다. 폴 버호벤 감독은 인터뷰에서 원작 소설이 자기랑 안 맞아 중간까지 만보고 내려놓았다고 얘기하기도 했었죠. 물론 지금은 그냥 농담이었다는 얘기도 있지만요.
영화 중간중간 영화 속 세계관의 뉴스들이 등장하는데 이들도 굉장히 적나라하게 '이것은 풍자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빨리 입대하고 싶어 하는 어린이라거나 바퀴벌레가 외계인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밟아 죽이면서 좋아하는 일반 시민들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제삼자인 관객의 입장에서 이는 몹시 기괴하게 비춰집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리코, 카르멘, 칼이 과연 영화 속 세계관에 실재하는 인물인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 <스타쉽 트루퍼스>가 영화 속 세계관에 존재하는 선전영화이고 이 세 인물은 가상의 인물이라고 해도 충분히 믿어질 것 같거든요.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비극적일 것 같습니다. 실제 전장은 영화에 비치는 전장 그 이상으로 참혹하다는 이야기일 테니까요
영화의 전체적인 메시지와는 별개로 그냥저냥 호쾌한 액션 영화로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이긴 합니다. 주인공의 사상적 성장의 방향이 좀 이상할 뿐이지만 나름 좋은 성장물이기도 하고요.
당시에나 지금에나 특수효과 연출은 굉장히 뛰어나서 꽤 그럴듯한 비주얼의 외계인들과 우주전함의 모습들이 볼만한 편입니다. 다소 고어한 연출들이 자주 나오는데 이게 영화 전체의 가벼운 분위기와 은근히 잘 어우러지면서 이 영화만의 독특한 B급 분위기가 살아납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위스키 기지 공방전은 지금 봐도 CG가 그렇게 어색하지 않고 절박한 방어전의 연출도 훌륭한 편입니다. 지금도 스타쉽 트루퍼스 하면 떠오르는 대표 장면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영화가 전체적으로 캐주얼한 분위기를 지향하기 때문에 설정상의 허점도 참 많은 영화인데요. 몇 가지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분명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전투에서 기계화장비의 비중이 지나치게 낮고 소총병의 비중이 지나치게 커 보입니다. 기계화만 보다 잘되어있어도 클렌다투 공략전에서 30만 명이라는 그런 처참한 전사자가 나오지는 않았겠지요.
- 지구 인구가 많아 탱크보다 보병으로 그냥 때우는 게 더 저렴한 사회가 되었다면 설득력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구에서 탱크를 만들어서 다른 행성으로 보내는 게 인간을 보내는 것보다 무거운 만큼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기도 하겠죠.
이런 속사정과 군국주의 사회 특유의 인명경시 풍조가 맞물려서 그런 것이라면 이해는 갑니다- 중간에 잠깐 나오는 핵 로켓런처 발사기가 몇 개만 있었어도 위스키 기지가 그렇게 허무하게 점령당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왜 지급이 안된 건지 의문입니다.
- 아라크니드 버그는 팔만 휘둘러도 병사들을 썰어 댈 수 있는데 병사들은 적어도 총알 수십 발을 쏴야 아라크니드 버그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교환비도 끔찍한 수준인데 수뇌부의 정신 나간 전술로 과연 이대로 이길 가망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긴 합니다
스타쉽 트루퍼스는 과연 훌륭한 블랙코미디일까요? 과연 사람들은 감독의 의도를 잘 이해했을까요?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초반의 다소 불편한 사상 수업이나 전장의 비참한 장면들에 대한 기억은 흐려지고 '기동보병이 역시 최고'같은 인상만 남습니다. 작중 내 선전영화라면 성공한 셈이고 현실의 풍자영화라면 조금은 실패한 셈일지도 몰라요. 실제로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많은 미국 언론에서 파시즘을 옹호하는 영화라며 비판하는 의견들을 내놓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스타쉽 트루퍼스>의 메시지에 대한 오독과 오용이 상대적으로 더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 같은데 아마 징병제 국가이기 때문일겁니다. 특히나 권리는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의무를 행해야만 주어진다는 대사는 ' 일침짤'이 되어 남초 커뮤니티를 돌아다니고 있죠
혹시 아직도 그렇게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한 번쯤 추억도 되살릴 겸 다시 한번 블랙코미디로 이 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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